글쓴이: 장석용

한국 최초의 본격적 영화이론서를 내었던 한국의 대표적인 영화평론가 邊山 변인식의 평론작업을 살펴봄으로써 한국영화이론의 정착과정과 그 미래를 살펴본다. 그와의 대화는 20년이 넘게 동참, 참여, 관찰과 동지애 등으로 이루어져 왔으며, 개인적으로 영화 평론가들 중 가장 많이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어 그의 구술과 객관적 자료를 토대로 이 원고를 마련해 본다.

이 글은 변인식과(의) 1. 영화 평론 입문 2. 영화예술 3. 소형.단편 영화 운동 4. 동서영화 연구회 5. 현대영화비평가그룹활동 6. 계간 영상시대 7. 영화평론 발행인 8. 복간 영화예술 9. 저술 10. 연보 순으로 이루어져 있고 고유명사나 당사자가 붙인 제목이 요즘과 달라도 당시의 분위기를 전하기 위해 그대로 사용한다. 영화평론가 안병섭은 ‘영화 평론가의 등용문- 영화평론가의 등단제도를 중심으로’ (1993년 5월 격월간 『영화』 30-32쪽) 라는 글에서 (중략)

“영화 평론의 필요성이 절실하던 60년대 몇 개 신문사의 신춘문예에서 영화평론 부문을 모집했다. 일부의 경우 별로 성과를 보지 못했으나 서울신문은 제 1회인 1968년 변인식이 《한국문예 영화의 허점》으로 등단했다. 그 후 洪 波도 이 관문을 통해 데뷔했다. 이영일이 발행하는 『영화예술』은 그보다 앞서 추천식으로 신인평론가를 등단시켰다. 1965년 변인식이 《이탈리안 네오리얼리즘론》, 곧 이어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론》으로 추천완료 후 서울신문에 도전한 것이다. 그 후 『영화예술』은 몇 명 더 신인 평론가를 배출했다. 그러다가 서울신문사 발행의 스포츠서울이 신춘문예에 영화평론 부문을 신설했다. 서울 신문 본지의 것이 폐지되고 스포츠지로 바뀐 것이다. 80년대의 1회에 지금의 동아일보기자 박제균이 당선되었고, 88년 박평식의 《사랑, 그 인간 구원의 미학-배창호론》이 당선되었다.

『영화예술』복간 후 다시 2회 추천제를 실시하여 90년4월 장석용이 《뉴저먼 시네마의 형성과 그 작가들》로, 92년 8월 채명식이 《때깔 하얀 자들이 벌인 전쟁 - 하얀전쟁론》을 추천 받았으나, 이미 영화 비평 활동을 하고 있어서 1회 추천으로 평론계에 등단했다. 그리고 조혜정이 91년 9월 《알렝레네, 영화 시간 개념》과 11월에 《눈에 보이지 않는 실존의 영상,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으로 2회 추천을 마쳐, 영화 평론계에 등단했다. 이 두 개의 정식 등용문이 영화 평론가가 되는 관문인 셈이다」라고 한국의 영화평론 등단에서 변인식의 위치를 자세히 적고 있다. 결국 변인식은 전문지 추천과 신춘문예 평론부문 당선으로 양수겸장(兩手兼將)의 행운을 거머쥔 셈이다」라고 한국의 영화평론가 등단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1. 영화평론가 입문시절
○ 성장 배경과 영화 평론가 데뷔
변인식은 1938년 4월 24일 서울 혜화동에서 변태순구복길의 3남 1녀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서울 혜화 유치원을 거쳐 혜화 초등학교 6학년을 다니던 열 세살 소년 시절 6.25 동란을 맞게 된다. 1951년 1.4 후퇴 때 그는 임시수도인 부산으로 피난, 그곳의 남부민 피란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경복 중학교에 입학, 중3때 서울로 환도, 경복 고등학교를 졸업한다. 1953년 여름. 그는 3년 간 부산 피난시절을 끝내고 그립던 서울로 돌아왔을 때는 열 여섯짜리 소년이었다. 마침 어렸을 적부터 살던 동리인 혜화동에 위치한 보성 고교에는 미군부대가 주둔해 있었다. 그 학교의 위 운동장은 산기슭을 깎아서 만든 것이었는데, 사흘 간격으로 밤마다 영화가 한 두 편씩 상영되었다. 미군들을 위문하기 위해 본토나 일본에서 직송해온 필름들이어서 시중에서는 개봉되지 않은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렇다고 불청객들이 운동장 안에 들어가서 보는 것이 아니라 철조망 밖 산언덕에 백 여명이 죽 앉아서 영화를 보는 것이었다. 물론 번역 자막이 있을 리 없었건만 액션 영화의 경우 대강 줄거리를 더듬을 수는 있었다. 대부분이 액션영화 아니면 멜로드라마였다. 이때 본 영화들이 100편 가까이에 달하였다. 변인식과 혜화 유치원, 혜화 초등학교를 함께 다닌 이충한도 단골 관객이었는데, 그는 후에 중견언론인이 되어 서울 YMCA 영상문화 위원장직도 맡아서 일했다.

그 때 사춘기를 갓 넘겼거나 아직도 감수성이 예민했던 시절 6.25 전쟁이 가져다 준 정신적 폐해는 오랫동안 정서적 공동 현상을 가져왔고, 그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컴컴한 도서관인 극장을 찾아가 열심히 영화를 봤다. 그것은 현실의 아픔을 꿈이라고 불리는 영화로 대체하고자 하는 일종의 도피 기회였기도 했다. 이 때 그가 본 영화가 『애수』, 『망향』, 『폭풍의 언덕』, 『카사블랑카』, 『역마차』, 『황색 리본』, 『황야의 결투』, 『싱고아라』등 이었고, 영화라는 대중 오락매체에 대한 개안을 시작한 시기였다. 그가 더욱 정진하여 영화에 매료되어 영상의 세례까지 받은 시기는 경복 고교 시절이었다. 故 박판길 교수가 당시 음악 교사로 부임 이따금 영화이야기를 들려주던 때였다. 장 콕도 의 『비련』, 『미녀와 야수』를 비롯한 프랑스 영화와 『자전차 도적』, 『종착역』같은 이탈리아 영화들을 소개해주었던 것이다. 그는 어렸을 적부터 그림 그리기에 소질이 있었다. 전국 아동 미술 실기대회에 학교 대표로 나가 2등 상을 탄 적도 있었기에 자연히 화가를 지망했었는데, 결국 ‘움직이는 그림’인 영화 쪽과 관련을 맺게 되었다. 경복고 시절에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허리우드 키드’로 개봉 첫날 첫 회에 영화를 보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던 지독한 영화광이었다. 이 때 키드들은 앉은 자리에서 영화제목과 영화감독 100명 외우기 등 마니아를 자부했다. 최대의 라이벌이었던 배상덕 (미국명 마이클 배)은 1988년 미국 직배사인 UIP 한국 지사장이 되어 신토불이 對 할리우드産의 운명적 만남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그는 고려대에서 문학을 전공했지만 1958년 최초의 영화 서클인 <영상> 동인회를 조직 활동했다. 이 무렵 『영화예술』에 영화평 『열쇠』(캐롤 리드감독)를 기고했다. 그는 대학신문에 영화 평론을 기고하는 한 편 유현목, 이강천 등 현역 감독과 이영일, 노만 등 영화평론가를 초청해서 진지하게 영화에 대한 토론을 벌였었다. 그 후 이들 동인들은 사회에 진출 각기 영상 매체와 연관을 맺었다. 이유황박성조는 시나리오, 유호석은 다큐멘터리 영화, 유길촌은 연기와 연출, 그리고 변인식은 대학졸업 후 이영일이 주간으로 있던 영화 전문지 『영화예술』을 통해 평론 ≪영화 현실과 포토 제니-이탈리안, 네오 리얼리즘과 한국영화≫(1965년, 6월호), ≪침식당한 사랑의 신화-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론≫(1965년, 7월호)이 추천되어 영화 평단에 데뷔하였다. 이어 1968년 서울신문사 주최 신춘문예 제1회 영화 평론 부문에서 논문 ‘한국 문예 영화의 허점’ 이 당선되었다.

변인식의 신춘문예 제1회 영화평론 당선 축하연이 1968년 1월18일 서울 무교동 소재 호수그릴에서 성황리에 베풀어졌다. 이 날 모임에서 고대 박성의 교수(국문학자)와 평론가 이영일이 축사를 했다.

변인식과 영화 『화분』 논쟁(1972년 3월9일-4월1일)
영화 『화분』 논쟁은 제9회 청룡영화상 심사에서 이 작품이 한국 영화의 보수성에 눌려 본격적인 검토도 받지 못한 체 밀려났다는 동아일보 기사에서 비롯되었다. 이에 대한 심사위원 유한철씨의 ‘청룡 영화 심사이론에 답한다’, 하길종 감독의 ‘반론 영화를 보는 눈’, 그리고 영화 평론가 변인식의 ‘영화적 색맹성’으로 이어지는 『화분』 논쟁은 현대영화를 둘러싼 보기 드문 영화 논쟁으로 큰 관심을 모았다.(『한국논쟁사』,편자 손세일,1976년)

○ 첫 번째 평론집 <영화미의 반란> (1972년) 발문
※ 아래 글은 1970년대 말 지독한 영화 불황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영화예술화 운동인 ‘영상시대’를 주도했던 하길종 감독이 동인이던 평론가 변인식의 첫 번째 평론집 『영화미의 반란』의 발문 ‘인식과 스핑크스’를 통해 표현된 끈끈한 우정과 영화사랑에 대한 獻呈辭 이다.

「인식을 대할 때마다 나는 스핑크스를 생각한다. 지나가는 행인에게 아침에는 네 발, 낮에는 두 발, 저녁에는 세 발인 것이 무어냐라는 수수께끼를 내고 바른 대답을 주지 못하면 죽이곤 했던 고대 테베시의 괴마 같은 인상을 그로부터 받는다. 그러나, 그의 참 모습은 테베시의 괴마처럼 우악스럽거나 이질적인 형상만을 보이지는 않는다. 그의 시선은 냉정하며 예지에 가득 차있으며 그러나 우울한 것이다. 인식은 항시 침묵하나 그의 스핑크스적 침묵 밑에 도사린 번뜩이는 비평정신은 점차로 메띠에 의식 속에서 넓고 곧 바르게 성장한다.

내가 (변)인식을 처음 만난 것은 여름비가 죽죽 내리는 1970년 여름, 지나가는 행인들이 넓고 큰 유리창을 통해 환히 보이는 명동의 코지코너 찻집이었다. 그때 그는 창가에 혼자 앉아 꼭 스핑크스 같은 표정을 하고 창문을 통해 행인들을 고독하게 들여다보고 있었고, 승옥이 나를 소개하자 그는 눈을 끔벅이더니 혼자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창 밖으로 잠시 고개를 돌리더니 인식은 불쑥 하형은 바른 답을 압니까? 라는 엉뚱한 질문을 했다. 스핑크스 같은 친구. 그 날 우리 셋은 의기투합하여 맘껏 떠들어 대고, 서로가 감추어 둔 얼굴을 조금씩 공개했다. 나는 줄곧 인식이 무엇인가 짙게 갈구하고 있으면서도 이를 토해내지 못하는 아픔을 읽었다. 후에야 그의 모습이 바로 시네마 부재의 한국 영화계에 대한 유능한 젊은 평론가의 부조리한 표정이며 동시에 방화의 새로운 활로를 개척하기 위한 한 비평가의 고뇌의 초상임을 알게 됐다. 인식은 과묵하고 성실하다. 그가 유능하고 젊은 영화평론가라는 이유만이 아닌 그의 책임감과 끈질긴 집념은 인식을 좋아하는 그가 『映畵美의 반란』이란 한국 영화비평계의 유일한 평론집을 소리없이 엮어냈다. 외국어로만 된 비슷한 책들을 대해온 나는 인식이 그저 고맙고 자랑스러울 뿐이다. 이 낯설은 영화 비평집이 내게 주는 감흥은 고마움과 그리고 그의 가장 의젓이 서있는 불꽃같은 정신의 고귀함 같은 것이다. 이 책자에 알알이 담겨져 있는 투박한 시정신, 번뜩이는 비평정신은 분꽃을 피우는 피리소리마냥 면면히 흘러 다시 뜨거운 사랑을 우리 모두가 주게 한다.

나는 이제 그가 옛날의 찻집에서와 같이 스핑크스와 같이 스핑크스의 질문을 한다면 쉽게 답할 것이다. 답변의 하나는 여자, 다른 하나는 우리가 만들어야 할 영화일 것이다.
그러나 한국영화계가 이 엄청난 허상의 테두리에서 과감히 벗어나지 않는 한 인식의 질문에 아무도 하나의 답을 주지 못할 것이다.」

변인식은 《내가 가는 이 길 - 영화, 그 감성과 이성의 오버랩》(1990년4월『현대해상』)에서 “내가 영화 비평의 길에 오르게 된 것은 미국 영화의 오락성과 유럽영화의 예술성이 감수성이 강했던 10대시절에 큰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라고 회고했다.

그의 첫 번째 영화 평론집 『映畵美의 反亂』(1972,태극 출판사)의 서문 《영화 아웃사이더의 변》에서 “마침 그 해(1960년)에 제 3집을 꾸민 이영일(평론가)씨 주재의 『영화 예술』誌에 글이 실릴 기회가 있었다. 캬롤 리드에 대한 몇 줄의 평문이 나로 하여금 ‘영화 비평의 길’에 오르는 비자 구실을 할 줄은 그 당시 몰랐던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변인식의 영화평론은 1960년대부터 2001년 현재까지 40년에 걸쳐 대략 5기로 분류된다.
①제1기/1965년~1972년 (8년) ②제2기/1972년~1979년 (8년) ③제3기/1979년~1985년 (7년)
④제4기/1986년~1994년 (9년) ⑤제5기/1995년~2001년 (7년)

◇ 제1기
변인식은 한국에서 발행된 영화전문지 『영화 예술』이 최초로 실시하는 ‘영화 평론’ 모집에서 제 1회로 추천이 완료되어 등단, 같은 해 창립(1960.11.10)된 한국영화평론가협회의 창립회원으로 참가하였다. 창립회원은 이영일(회장), 김종원(총무간사), 노만(기획간사), 김정옥, 최일수, 황운헌, 허 창, 이진연, 변인식, 최성규 등 10명이었다. 이 기간 중 서울신문 신춘문예 제 1회 영화평론에 당선 (심사위원 김정옥) 되었다.이 기간에 발표된 평론 중 《영화 평단은 자유항인가 - 비평의 모랄과 순수성》(1965년 『영화 예술』 12월호)는 당시 기성평단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가해 적잖은 반향을 일으켰다. 평론 II부 ‘단장의 마술사들’은 국내 일간지들의 리뷰나 단평에 대한 비판, III부 ‘영화상과 품명위원제씨’는 국․내외 영화제 심사위원들의 자격에 대한 비판을 가했다. 이 글로 인해 일부 일간 신문 영화평 담당기자와 껄끄러운 관계가 한동안 유지되기도 하였다.

◇ 제2기
한국영화 평론계의 첫 번째의 본격적인 평론집 『映畵美의 반란』(1972년 태극출판사刊)을 출간한 것과 1972년~1973년 『소형영화』(1권,2권) 주간을 맡아 발행한 것. 현대영화비평가그룹의 뉴스레터 『영화비평』(창간1호 1973.1.10) 『영화비평』(제2호 1973.12.10)을 발행한 것. 1976년 일간 스포츠 영화평 고정 집필, 1977년 季刊 『영상시대』 (창간호), 1978년 『영상 시대』(제 2호) 를 발행한 것.

◇ 제3기
1979년 『동서 영화 동우회 회보』(1호~3호,1979년 4월~12월) 발행과 동인지 『프레임 24분의 1』(FRAME ONE-TWENTY FOURTH) 에서 祝辭 ‘새 지평을 향해 떠나가라’ 게재 및 발행. 1980년 일간 스포츠 《인물 영화사》연재.

◇ 제 4기
1985년 『세계 영화배우 평전』(전 20권), 1986년 일간 스포츠에 ‘영화평’ 고정집필, 1989년 ‘한국 영화 70년 대표작 200선’ 선정위원, 1991년~1992년 『영화 평론』(3호~4호) 발행인

◇ 제 5기
1995년 제2평론집『영화를 향하여 미래를 향하여』 발간, 1995년 청룡영화제 제2회 정영일 영화상 수상. 1995년~2001년 『예술 평론』발행 겸 편집인, 2000년 9월호 월간 『키노』 서른명의 영화 평론가들로부터의 화두, 「90년대 한국영화의 화두, ‘조랑말’」 집필. KAFAI에 영화평 『섬』(2000년 9,10월호) 게재, 국제 비평가연맹 한국 본부 회지 『영화 비평』에 영화평 박하사탕 게재(2001년).

변인식은 영화평론을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 몇 가지 영화운동에 참여한 바 있다. 고려대재학 시절 <영상> 동인을 통해 동아리에 참여하면서 [고대신문] 영화 동인지 등에 영화평론을 기고하였다. 변인식의 영화평이 처음으로 기성 영화잡지에 게재된 것은 1960년 4월호 『영화 예술』 (主幹 이영일) 독자투고란에 실린 외화 『키이』(The key) 평이었다. 고대 <영상> 동인인 유호석이 같은 란의 외화 『흑과 백』평을 나란히 게재했다. 초기의 그의 비평 경향을 알아보기 위해 그의 비평을 여기에 옮겨본다.

캬롤 리드의 신작 『키이』는 화란의 인기 작가 할도호의 베스트셀러인 『스테라』를 영화화한 것이다. 영국의 가장 날카로운 감각을 가진 디렉타로 전세계에 널리 알려진 캬롤 리드는 이 작품을 통해서도 예리한 터치로 인간성의 탐구와 성격 묘사에 주력하고 있다.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2차대전의 풍설 속에 몸을 담은 바다의 사나이들. 대서양을 횡단하여 오는 수송선단의 끊임없는 S.O.S…. 독일 공군과 잠수함 U보트의 습격을 받아 항해 불능에 놓여 있는 화물선을 구출하는 그야말로 위험천만한 임무를 띈 예인선의 역할은 해양 적십자사라 할만하다. 이렇게 죽음이라는 그림자를 달고 다니는 예인선의 선장들은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친구에게 아파트 12호실의 열쇠와 함께, 한 아름다운 여인을 넘겨준다.

선장 필립 할바가 그리고 크리스의 순서로 나타나는 이들에게 거의 중용에 가까운 태도로 봉사하고 있는 스테라. (소피아 로렌扮)의 과거와 현재에 대한 의혹감. 어쨌든 스테라는 전투에서 시달려 온 사나이들의 휴식의 대상이 되고 있다. 첫사랑인 필립의 환영을 떨구지 못하는 스테라에게 네 번째로 나타난 데이비드(월리엄 홀덴扮)에 대한 것도 예외 없이 무감각하였으나, 끝내는 새로운 사랑을 깨닫는다는 것이 풀롯이다. 이 스테라라는 여인의 절묘한 심리적인 상태는 『제 3의 사나이』에서의 봐리의 중용적인 애정관에도 통한다고 하겠다. 다큐멘타리에 수련을 쌓은 바 있는 캬롤 리드의 빈틈없는 쇼트처리는 구도의 정확성을 기하고 있으며 특히 격렬한 해상 전투 신의 촬영은 박력을 더한 바 있다.

『공중 트라피즈』 이후 리드 작품에 나타나는 아메리카적인 타협성이 군데군데 눈에 거슬리기는 하나, 전체적인 짜임이 스릴러 영화에서 느끼는 것 같은 긴장감속에서 심리적인 갈등을 보여주었다. 견습생의 과정을 지나 처녀 지휘를 하는 풋내기 선장. 홀덴의 약간 거북스러운 위엄이 유머러스하게 그려졌고 소피아 로렌은 그의 밑천인, 그래머 걸로서의 본령을 아끼면서(?) 오히려 심리적인 연기에 노력한 듯 하다. 스테라가 교회당에 찾아가 기도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여기선 훼리니의 『카리비아의 밤』에 나오는 창녀의 기도 같은 아름다움이 페이소스하게 그려져 있다. 그리스(트레봐 하와드扮)의 호탕한 연기가 좋았고, 스릴러물의 범인 같은 표정을 짓는, 케인(키론 무어扮) 의 연기가 인상적이다.

사랑에 배신당한 슬픈 심경의 스테라가 웨스트포트를 떠나는 차중에서 마지막으로 믿었던 이가 주고 간 ‘맞열쇠’를 좌석 아래로 밀어 넣는 거의 체념적인 표정과 꼭 스테라를 찾고야 말겠다고 프렛홈에서 중얼대는, 데이빗드의 안타까운 표정의 콘트라스트한게 그려져 여운을 남기고 있다. 세련된 영화감각에 의한 캬롤 리드의 연출은 이 작품의 3요소를 이루고 있는 시나리오, 카메라, 몬타쥬의 우수성과 함께 높이 평가돼야겠다. 전쟁이라는 혼돈된 상황속에서 진실된 애정을 추구하는 인간들에게 이 작품은 타이틀이 상징함과 같이 해결의 암시성을 띄우고 있다.」

2. 변인식과 영화전문지 『영화 예술』
영화 평론가 입문에 있어서 변인식은 1965년 6월호 『영화 예술』誌에 평론 《영화 현실과 포토 제니-이탈리안 네오리얼리즘과 한국 영화》, 1965년 7월호 『영화 예술』誌에 평론 《침식당한 사랑의 신화-미켈란젤로․안토니오니론》이 추천되어 영화평단에 등단하였다.

이영일의 신인평론 추천기
「먼저 달에 제 1회로 논문이 추천되었던 邊仁植군의 두 번째 논문 《침식당한 사랑의 신화》를 제2회 추천 논문으로서 내보낸다. 이번 논문은 전작 《영화현실과 포토 제니》보다도 훨씬 문장도 부드럽고 읽기에 시원스럽다. 이 말은 그 내용이 가볍다거나 테마가 소규모의 것이라는 뜻이 아니라, 그만큼 한 비평가의 성숙도를 보여주는 것 일 것이다. 안토니오니론으로 쓰여진 이번 논문은 전작의 발전이라고도 볼 수 있고, 독립된 한 사람의 영화작가론이라고 보아서 손색이 없다. 길지 않은 논문이었지만 거기에서 필자는 안토니오니의 영화작가로서의 문제성과 그 방법론을 아주 간명하면서도 포인트를 눌러가며 다루었다. 이로서 『영화예술』誌는 영화 평론가가 드문 이 땅에 한 사람의 유능한 신인평론가를 동인으로서 맞아드리게 된다. 현재 균명 중고등학교의 교사인 변인식군은 오로지 영화 이론의 분야에 끊임없는 이론과 비평활동으로서 영화논단에 업적을 남겨주기를 바라는 바이다.」 (1965년 7월호 『영화 예술』誌)

이영일 평론가가 필생의 업적으로 남긴 영화전문지 월간 『영화 예술』과 평론가 변인식과의 인연은 자그만치 40년전부터로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월간 『영화 예술』이 고고의 성을 말하면서 이 땅에 태어난 해는 지금부터 42년전인 1959년 12월이었다. 당시 유일무이한 영화전문지인 『영화 예술』은 4*6배 판형으로 표지에는 잉그리드 버그만의 단아한 모습을 게재하였다. 이 잡지는 5․16 군부 쿠데타의 와중 속에 폐간되었다. 『영화 예술』은 불사조처럼 1965년 4월에 국판 사이즈로 옷을 갈아입고 복간되었다. 그러나 1970년대를 동결시켰던 유신정국과 불황기를 맞아 1972년에 또 다시 좌초되어 발행을 중단하는 비운을 맞았다. 이 8년간 변인식은 고정 필자 겸 편집자문위원으로 『영화 예술』과 고락을 함께 나누었다. 그 후 이영일은 17년이라고 하는 긴 시간을 침묵하면서 저술과 국제적인 비평활동에 열중하였다. 그러나 이영일의 끈덕진 집념은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 이하 생략. (더 많은 글은 http://blog.naver.com/changpau 참조)

글: 장석용 교사
- 신일고 독일어 교사/동국대 대학원 연극영화과 박사 수료/경희대, 동국대,
인하대, 이화여대 강의
-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꽃은 나비를 원한다, 내 영혼의 사막에서 등 희곡번역
- <영화연구>번역/코리아 헤럴드에서 3년간 <시네마>칼럼 고정 집필
- 테렌스 영 감독 통역관
- 이태리 황금금배상 심사위원/국제영화비평가연맹(독일)
회원/KBS국제방송담당
- 한국 희곡 작가협회 회원/영화평론가/한국영화학회 학술이사 총무이사
재무이사 역임
-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총무로 10년간 운영/국제영화비평가연맹 초대사무국장/대종상 심사위원/
한국예술실험영화심사위원/한국소형단편영화 심사위원
- 저서 <코리언 뉴웨이브의 징후를 찾아서>등 다수.

참고- 변인식 은사님은 현재 지병인 알츠하이머 때문에 거동이 다소 불편하시지만 동문회 행사에 자주 참석하고 계시다.

영원한 장풍 파워 - 변슨 브론슨

Episode 1
1학년 첫 국어시간. 장발에 구부정한 그 모습. 거기에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째려보는 듯한 눈매로 전체를 둘러보시더니 군기를 잡으려는 듯 훈계를 시작하셨다 (수업에 집중하고 학교생활 잘하라는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난다). 하지만 카리스마보다는 뭔가 코믹함이 넘칠듯한 모습에 우리는 웃어야 할 지 참아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내용상으로는 심각한 말씀이 진행되고 있는 그 귀중한(?) 타임에 한 친구가 거드는 듯한 말대꾸를 하다가 직통으로 걸렸다.
불려 나온 그 친구는 별 잘못도 없는 것 같았는데 한마디로 오지게 얻어 터졌다. 이른바 시범 케이스라는 것이었다. 그때 들은 말이 어느 반엔가도 까부는 놈이 있어 손을 봐주었다는 이야기였다. 그 시범케이스 구타 사건 이후에야 우리는 아무 때나 웃을 수 있었는데 정작 당한 본인은 얼마나 열이 받았을까?

2학년이 되어 새로운 친구들이 만나 친한 무리를 이루게 되었는데 유유상종이라고나 할까, 시범케이스 둘이 한 무리에 속하게 된 것이었다. 나중에 그 둘은 서로가 같은 처지였던 시범케이스라는 걸 알고는 더욱 친하게 지내게 되었다. 변인식 선생님이 만들어준 우정의 주인공들은 하나는 허* 이요, 또 하나는 공**이었다

Episode 2
변인식 선생님은 교지에 신일 10주년을 축하하는 시를 써서 내게는 색다른 감동을 주었던 분이시다.
"신일 열걸음발 타다"라는 제목이었는데 한자어보다는 순 우리말의 리듬을 아주 절묘하게 이용한 시였다. 또한 교지에는 선생님들이 자신의 얘기를 쓰는 자화상이라는 코너가 있었는데 대부분 자화상이라고 하던 삽화는 신정식 선생님이 그려주셨고 글은 본인들이 쓰는 코너였다.
거기에 변 선생님이 썼던 글 중에서 이런 구절이 생각난다.

"한때는 미남이라고 자부를 했건만 세월이 흐르며 이발을 해야 내가 나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는 내용이었다. 그 뒤에 변 선생님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소싯적에 미남이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Episode 3
내가 성북구청에 근무를 하다 보니 우리나라 영화의 효시라 할 수 있는 나운규 선생의 아리랑 촬영지인 아리랑고개를 영화의 거리로 지정을 하고 그와 관련된 행사를 많이 하게 된다. 언젠가 성북구민의 날 행사의 일환으로 영화제 관련 행사가 있었는데 사전에 섭외가 된 영화평론가가 사정으로 나올 수 없게 되자 관련부서에서 부랴부랴 대타로 모셔온 분이 알고 보니 변인식 선생님이셨다. 우리나라 영화사에 길이 남을 영화들을 소개하는 시간이었는데 자료화면은 먼저 섭외한 평론가가 준비한 것인지라 변선생님은 사전에 한번도 검토를 못하신 모양이었다. 화면이 나오고 화면을 보시다가 생각이 나면 어떤 영화인지를 설명하시는 데 원고도 없이 줄줄 말씀하시는 것이 감탄을 자아냈다. 그런데 잘나가던 상황이 삐딱선을 탄 것은 거의 끝부분에 이르러서였다. 나도 알 것 같은 화면이 나왔는데 선생님 말씀하시길,

"제가 우리나라 영화는 거의 다 보았지만 이 장면은 처음 봅니다" 하시는 것이 아닌가!

당황한 사회자가 "이거 임권택 감독의 작품이라 영상미가 다릅니다" 하고 재빠른 수습에 들어갔지만 선생님은 "뭐 제가 100% 모든 영화를 볼 수도 없는 것이고" 하시며 머리를 긁적이시는 데 길만 보이던 화면에 배우 오정해의 얼굴이 클로즈업 되는 것이 아닌가?

“아! 서편제군요”
얼마나 무안하셨을까? (하필 편집을 고따구로 해가지고....)
행사 뒷풀이때 직원들이 그 얘기를 가지고 말이 많았지만 "워낙 재미있으신 분이라 웃기려고 그러신 것 같다. 대본도 없이, 해박한 영화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 대단한 분이지 않느냐" 하며 나는 열심히 선생님을 변호했던 기억이 난다. 대충 옛 기억들을 더듬어 보았다. 선생님, 건강하십시오.

* 본 글은 이문구 (9) 동문이 9회 동기 카페 (http://cafe.daum.net/shinil09)에 쓴 글을 옮긴 것입니다.